예를 들어보자.
A,B 두 사람이 있다. A는 일을 매우 잘하지만 시키지 않으면 일하지 않는다. B는 해야된다고 생각하는 일을 자발적으로 수행한다.
초반에 A는 애초에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그대로의 빠르고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낸다. 그리고 A는 개선하지 않는다. 그 시점부터 A는 멈춘 상태이다. B는 주어진 일의 이면에 목적을 생각한다. 그래서 B는 무작정 일에 파고들지는 않는다. 목적과는 관계없다면 과감히 쳐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지시가 주어지지 않더라고 미리 목적을 향한 나름의 작업을 해둔다. 이것은 나중에 요긴한 경우가 많다. 필요한 시기에 이미 완성된 것을 내보여서 깜짝 놀라게 만들기도 한다. 시일이 지나면 성과는 확연히 다르다.
자발성 또는 열정은 그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는 우위에 있는 요소이다. 성과는 조만간에 역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의 인식은 그렇지않다. 권한이 있다면 기꺼이 B를 기꺼이 승진시킬 것이다. 그런데 부장급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A만을 유능하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B의 의견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B가 생각한 방향으로 간다고 하여도 오히려 B를 원망할 뿐이다. 실제로 '내 생각에는 B가 가장 유능하다'는 의견에 '그것은 결과물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얘기를 했었다. '결과물도 뛰어나다'고 했지만 그의 결과물이란 결국 절대복종하는 태도를 의미하는 듯이 보인다. B는 쓰지 못하고 버려질 결과물을 싫어하기 때문에 다른 의견도 제시하기 때문이다. B는 길을 바로잡기를 원한다. 예정된 실패는 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부장급은 버려질 결과물도 토달지 않고 만들기를 바라고 그걸 성과라고 생각한다. 버려지고 버려지고 버려진 후 마지막에 나오는 것을 처음부터 얻을 생각은 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들에게 성과란 무식하게 반복한 절대적 시간인 것이다.
도대체 자발성을 왜 눌러버려야 하는 요소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이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혜택으로 돌아가게 되는데.......다른 것은 얼마든지 개선할 수 있지만 이 요소만큼은 얻기 어려운 것인데 왜 있는 것마저도 눌러 없애려는건지.
2009년 5월 1일 금요일
시선
얼마나 허영된 존재인가?
며칠전 명함이 나와서 총무님께 드리면서 추가로 장로님 및 그 밖에 몇몇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도 함께 돌렸었다.
첫째는 나의 허영. 나는 왜 특정한 사람 몇몇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특히 장로님...분명히 인격적으로는 훌륭하시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배경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나는 차별하고 있는 거다. 그리고 몇분이 갑자기 색안경을 끼고 나를 보게되었을 때 근거없는 우쭐함은 왜 생기는 걸까? 겸손함을 미덕으로 삼는 사회에서, 세속적인 의미로 판단내리지 않기 위해 나를 한없이 작게 만들기 위해 기대는 세계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생각보다 배경이 괜찮구나하는 눈으로 볼때 겸손해지기가 너무 힘들다. 다니엘 전도사님이 구체적인 겸손을 가르쳐줬었는데 그래서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은데 마음이 흔들린다.
둘째는 그들의 허영. 색안경이라고 딱 꼬집을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니라고도 딱 꼬집을 수는 없다. 분명 보는 눈이 달라졌다. 총무님의 경우 '이거 좀 해주세요. 한가하시잖아요'->'취직했어요'->'명함주세요'->'책임이세요?' 이런 과정을 거쳐서 끝에 '요즘 시간이 있으니 제가 할께요.'로 슬픈 결말로 귀결되었다. 누구의 한가한 시간은 다른 누군가의 소유일까. 그리고 누구의 부족한 시간은 그 사람의 판단없이 다른이가 결정내려도 되는 것일까. 시간은 짜낼 수도 있는 것이고, 정말 그에게 시간이 없다면 거절하거나 미루거나 그럴 수 있는데 다른이가 지레짐작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부탁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데...다만 거절당할 경우 원망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의 관대함이 크거나 작을 뿐이지 나의 소유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종교적 단련 영역은 아닐지도 모른다.
객관적으로 운이 좋았다. 친구가 이 시기에 취직한 것만 해도 운이 좋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고 했었다.
.....그러니 벗어버리자. 편견도. 우물도.
며칠전 명함이 나와서 총무님께 드리면서 추가로 장로님 및 그 밖에 몇몇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도 함께 돌렸었다.
첫째는 나의 허영. 나는 왜 특정한 사람 몇몇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특히 장로님...분명히 인격적으로는 훌륭하시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배경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나는 차별하고 있는 거다. 그리고 몇분이 갑자기 색안경을 끼고 나를 보게되었을 때 근거없는 우쭐함은 왜 생기는 걸까? 겸손함을 미덕으로 삼는 사회에서, 세속적인 의미로 판단내리지 않기 위해 나를 한없이 작게 만들기 위해 기대는 세계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생각보다 배경이 괜찮구나하는 눈으로 볼때 겸손해지기가 너무 힘들다. 다니엘 전도사님이 구체적인 겸손을 가르쳐줬었는데 그래서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은데 마음이 흔들린다.
둘째는 그들의 허영. 색안경이라고 딱 꼬집을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니라고도 딱 꼬집을 수는 없다. 분명 보는 눈이 달라졌다. 총무님의 경우 '이거 좀 해주세요. 한가하시잖아요'->'취직했어요'->'명함주세요'->'책임이세요?' 이런 과정을 거쳐서 끝에 '요즘 시간이 있으니 제가 할께요.'로 슬픈 결말로 귀결되었다. 누구의 한가한 시간은 다른 누군가의 소유일까. 그리고 누구의 부족한 시간은 그 사람의 판단없이 다른이가 결정내려도 되는 것일까. 시간은 짜낼 수도 있는 것이고, 정말 그에게 시간이 없다면 거절하거나 미루거나 그럴 수 있는데 다른이가 지레짐작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부탁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데...다만 거절당할 경우 원망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의 관대함이 크거나 작을 뿐이지 나의 소유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종교적 단련 영역은 아닐지도 모른다.
객관적으로 운이 좋았다. 친구가 이 시기에 취직한 것만 해도 운이 좋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고 했었다.
.....그러니 벗어버리자. 편견도. 우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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