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20일 토요일

자발성에 얼마만큼의 가치를 줘야 할까?

예를 들어보자.
A,B 두 사람이 있다. A는 일을 매우 잘하지만 시키지 않으면 일하지 않는다. B는 해야된다고 생각하는 일을 자발적으로 수행한다.
초반에 A는 애초에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그대로의 빠르고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낸다. 그리고 A는 개선하지 않는다. 그 시점부터 A는 멈춘 상태이다. B는 주어진 일의 이면에 목적을 생각한다. 그래서 B는 무작정 일에 파고들지는 않는다. 목적과는 관계없다면 과감히 쳐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지시가 주어지지 않더라고 미리 목적을 향한 나름의 작업을 해둔다. 이것은 나중에 요긴한 경우가 많다. 필요한 시기에 이미 완성된 것을 내보여서 깜짝 놀라게 만들기도 한다. 시일이 지나면 성과는 확연히 다르다.
자발성 또는 열정은 그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는 우위에 있는 요소이다. 성과는 조만간에 역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의 인식은 그렇지않다. 권한이 있다면 기꺼이 B를 기꺼이 승진시킬 것이다. 그런데 부장급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A만을 유능하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B의 의견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B가 생각한 방향으로 간다고 하여도 오히려 B를 원망할 뿐이다. 실제로 '내 생각에는 B가 가장 유능하다'는 의견에 '그것은 결과물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얘기를 했었다. '결과물도 뛰어나다'고 했지만 그의 결과물이란 결국 절대복종하는 태도를 의미하는 듯이 보인다. B는 쓰지 못하고 버려질 결과물을 싫어하기 때문에 다른 의견도 제시하기 때문이다. B는 길을 바로잡기를 원한다. 예정된 실패는 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부장급은 버려질 결과물도 토달지 않고 만들기를 바라고 그걸 성과라고 생각한다. 버려지고 버려지고 버려진 후 마지막에 나오는 것을 처음부터 얻을 생각은 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들에게 성과란 무식하게 반복한 절대적 시간인 것이다.

도대체 자발성을 왜 눌러버려야 하는 요소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이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혜택으로 돌아가게 되는데.......다른 것은 얼마든지 개선할 수 있지만 이 요소만큼은 얻기 어려운 것인데 왜 있는 것마저도 눌러 없애려는건지.

2009년 5월 5일 화요일

다니엘 전도사님 설교

가끔 전도사님의 설교 중에는 감탄하게 하는 점이 있다.
첫번째는 주제에 대한 것이다.

감명 주제 리스트
Humility
Self-Sufficient에서 벗어나는 것
Lukewarm에 대해서

너무 감명을 받은 나머지 생활화하려고 한다.
또 하나는 태도에 대한 것이다.

  • 전도사님의 설교는 구체적이다.
  • Humility가 무엇이냐? 어떻게 획득할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뜬구름잡는 얘기를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우화처럼 간단하게 이해시킬 수 있다. 그래서 쉽게 실천할 수가 있다.

  • 나의 상황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 마치 살짝 박혀있던 가시를 꾹 밀어서 가시가 박혀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려는 듯이. 뭔가 찜찜한 부분을 간직하고 덮어놓고 있었는데 덮어놓을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시의적절하다.

  • 사람을 대할 때 평등하다.
  •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과 어른을 대하는 태도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고 어떤 사람에게도 존경심과 애정을 보인다. 어쩌면 나이가 어려서 때타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지만 순수하고 권위에 휘둘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소리처럼 들린다.


    시의적절하고 대상도 분명하고 구체적인 실천방향까지 제시했으니 얼마나 훌륭한 배움인가.
    그런데 요즘 토요일마다 다니엘 전도사님이 사이비틱하기도 하고 사심이 가득 담겨있는 듯도 한 트레저헌터라는 모임을 열성적으로 하고 있는데 나로서는 이해는 안가지만 한 명이라도 트레저를 발견했으면 좋겠다.(물론 본인은 동참할 생각이 없다. 애정은 동일시와는 관련이 없다.)

    2009년 5월 1일 금요일

    시선

    얼마나 허영된 존재인가?

    며칠전 명함이 나와서 총무님께 드리면서 추가로 장로님 및 그 밖에 몇몇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도 함께 돌렸었다.

    첫째는 나의 허영. 나는 왜 특정한 사람 몇몇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특히 장로님...분명히 인격적으로는 훌륭하시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배경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나는 차별하고 있는 거다. 그리고 몇분이 갑자기 색안경을 끼고 나를 보게되었을 때 근거없는 우쭐함은 왜 생기는 걸까? 겸손함을 미덕으로 삼는 사회에서, 세속적인 의미로 판단내리지 않기 위해 나를 한없이 작게 만들기 위해 기대는 세계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생각보다 배경이 괜찮구나하는 눈으로 볼때 겸손해지기가 너무 힘들다. 다니엘 전도사님이 구체적인 겸손을 가르쳐줬었는데 그래서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은데 마음이 흔들린다.

    둘째는 그들의 허영. 색안경이라고 딱 꼬집을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니라고도 딱 꼬집을 수는 없다. 분명 보는 눈이 달라졌다. 총무님의 경우 '이거 좀 해주세요. 한가하시잖아요'->'취직했어요'->'명함주세요'->'책임이세요?' 이런 과정을 거쳐서 끝에 '요즘 시간이 있으니 제가 할께요.'로 슬픈 결말로 귀결되었다. 누구의 한가한 시간은 다른 누군가의 소유일까. 그리고 누구의 부족한 시간은 그 사람의 판단없이 다른이가 결정내려도 되는 것일까. 시간은 짜낼 수도 있는 것이고, 정말 그에게 시간이 없다면 거절하거나 미루거나 그럴 수 있는데 다른이가 지레짐작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부탁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데...다만 거절당할 경우 원망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의 관대함이 크거나 작을 뿐이지 나의 소유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종교적 단련 영역은 아닐지도 모른다.


    객관적으로 운이 좋았다. 친구가 이 시기에 취직한 것만 해도 운이 좋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고 했었다.
    .....그러니 벗어버리자. 편견도. 우물도.

    오이도

    즐거움은 어디서 완결되는 것일까?

    급하게 오의도에 조개구이를 먹으러 갔다. 너무 늦게 출발한 나머지 오이도에 도착했을 때는 9시가 다 되어 있었다. 배가 고파서 미친 듯이 먹다가 첫번째 리필 시간에 간신히 진정이 되었다. 무한리필되는 줄 알았는데 서빙하시는 분이 진실을 얘기해 주시더라. '리필은 해드리지만 무한은 아니에요.' 이것이 정답이겠지. 사람 배가 한계가 있는데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두번째 리필도 간신히 해결했다. 조개구이 집에서 스타벅스 원두의 커피까지 제공해서 뽑아들고 등대 잠깐 보다가 시간이 늦어서 급하게 돌아와야 했다.

    고작 저녁 먹고 돌아온게 스토리의 전부지만 하루가 풍성한 느낌이였다. 바가지였던 택시요금, 금정에서 사당가는 열차 기다리다가 먹은 로얄밀크티도, 심지어는 발아프다고 투덜대는 잔소리까지...

    2009년 4월 26일 일요일

    현재 상태 묘사

    상태 : 즐겁다.

    이유 : '일'하면 떠올리던 나의 기본 이미지가 새롭게 시작하면서 달라졌다.

    원인 : 이곳은 마인드가 다르다. 여기 사람들은 나를 항상 긴급 상황에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말한다. 곧 타버릴 것처럼 행동한다고 여유를 찾으라고 한다. 이전에 있을 때는 언제나 위기 상황이였다. 그렇게 심각하거나 문제가 될 만한 일이 아닌데도 초조했었다. 그것이 불만이였다. 분명 아웃풋(기계적이라는 의미에서 성과라는 단어보다 적절할 것 같다)은 많고 빨랐다. 그래서 리더는 항상 푸쉬모드였다. 생각만으로도 피곤했다.

    결론 : 어느 분의 충고처럼 0.6/0.4(일/생활)의 비율을 맞출 것이다. 어느 분은 0.5라고도 했지만 일단은 일하고 싶으므로 0.6.....계속 이렇게 가고 싶다.